역사(歷史)

살수대첩

學而齋 2011. 4. 27. 15:44

수가 남북조를 통일하자(589) 그동안 남조와 북조, 북방의 유연(柔然), 돌궐(突厥), 고구려 사이에 균형을 이루었던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크게 요동쳤다. 통일 왕조인 수는 경제 성장을 위해 돌궐, 거란, 말갈 등에 대한 상권을 장악하고 동아시아의 패자(覇者)로 군림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고구려가 북방 민족들과 연결하여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수는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먼저 고구려를 정벌하기로 결정하였다.

수의 의도를 눈치 챈 고구려는 수와의 외교적 마찰을 최소화하면서 전쟁 준비를 한 후, 전략적 요충지인 요서 지방을 선제공격하였다. 수 문제는 이에 분노하여 30만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그러나 홍수와 태풍, 질병으로 성과 없이 물러났다.

수 문제에 이어 즉위한 양제는 물자 유통과 군사 이동을 위해 화북과 화중을 잇는 대운하를 건설하였다. 이어 돌궐을 정복한 다음 113만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611). 군대뿐 아니라 군수 물자 수송을 담당한 병력은 두 배에 달하여 차례로 출발하는 데 40일이 걸릴 정도였다. 그러나 5개월이 넘도록 수의 군대는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하였다. 초조해진 양제는 우중문, 우문술에게 30만의 별동대를 평양으로 보냈다. 급히 진격한 별동대는 군량 부족 및 수시로 공격하고 후퇴해버리는 고구려군 때문에 지쳐갔다. 이러한 적의 실상을 간파한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항복하는 문서를 보냈고, 철수할 명분이 생긴 우중문은 회군 명령을 내렸다. 퇴로를 열어주며 기회를 엿보던 을지문덕은 수 군대가 살수(薩水)를 건널 무렵 집중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살수 대첩). 30만의 대군 중 살아 돌아간 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전의를 상실한 양제는 퇴각하였다. 수는 이후에도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 멸망하였다(617). 살수대첩은 우리 역사상 단일 전투로서 거둔 최대의 승리로 평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