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而齋 2011. 4. 30. 21:43

숙종 때부터 붕당 정치가 크게 변질되어 사사가 반복되는 등 치열한 정쟁이 전개되고 결국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나게 되자 탕평론이 대두했다. 탕평이란 말은 서경(書經) 홍범(洪範)조의“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치우치지 않고 무리짓지 않으면 왕도(王道)가 광대(廣大)해지고 무리짓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가 평이(平易)해진다.)”이란 말에서 유래했다.

왕세제(왕(王)世弟) 시절부터 당쟁의 폐단을 뼈저리게 겪은 영조는 즉위(1724)하자마자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탕평의 필요를 역설하는 교서를 발표하여 탕평 정치의 의지를 천명했다. 노론과 소론의 영수들을 불러 직접 화목하게 지낼 것을 당부하는 한편, 자신의 시책에 호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파면했다. 또한,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고 노력하면서 탕평파를 적극 육성하여 자신의 정책을 뒷받침하고자 했다. 1742년에는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우고 당쟁의 해소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은 자신의 왕위 계승을 지지한 노론의 이해관계가 전제되었고, 왕실·외척 등의 특권 세력의 존재가 어느 정도 용인되었기 때문에 탕평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당쟁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오히려 사도 세자의 사건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로 붕당이 갈라졌다.

정조도 탕평책을 계승하여 붕당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데 노력했다. 심지어 서얼까지 규장각에 등용할 정도였다. 반면, 영조 대에 외척 세력을 중심으로 한 특권 정치 세력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성리학적 질서의 기본 요소인 의리·공론·청요직을 활성화하여 실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개혁 정치를 이끌고자 했다.

탕평책의 기본 정신은 왕권의 절대성을 회복하고 집권 관료 체제를 재정비하여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것이었으나 변화하던 당시의 다양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정책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