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歷史)

전민변정도감

學而齋 2011. 5. 13. 13:09

고려 후기 권세가에게 빼앗긴 토지·농민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주기 위해 설치된 임시 관서이다. 이 기관은 설치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권신으로 실각된 자가 불법으로 점탈한 토지·농민을 추쇄해 속공하거나 새로운 권신이 차지하기 위한 것으로서 1269, 1288, 1381, 1388년에 각각 설치된 관부가 그것이다. 즉, 1269년의 것은 최씨 무인 정권을 몰락시킨 김준의 전민(田民)을 임연·임유무 부자가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1288년의 것은 환관 최세연과 그 무리들이 소유했던 전민을, 1381년의 것은 이인임과 그 무리들, 그리고 1388년의 것은 임견미 등이 소유한 전민의 추쇄를 목적으로 하였다. 둘째, 노비법의 적용이 불합리해 이의 정정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서 1301년에 설치된 관부가 그것이다.

  1363년 5월에 공민왕은 20여 항목에 걸친 하교를 통해 여러 가지 폐단과 불법·부정을 바로잡는 개혁 의지를 천명하였고, 이듬해에 왕의 정치적인 지위가 안정되면서 새로운 정치 변혁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1365년에는 당시의 실권자였던 최영 등 강력한 무장 세력을 거세시키는 한편 편조(신돈)를 등장시켜 새로운 권력구성의 재편성을 이루었다. 신돈은 한해(旱害)와의 관련 아래 1365년에 설치된 형인추정도감의 기능을 확대 전환해 명칭을 전민변정도감으로 바꾸고, 스스로 판사가 되어 의욕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미 공민왕대에 권세가들이 공사전을 빼앗는 한편, 양인 농민층을 노예로 삼고 거대한 농장을 확대시키고 있었다. 또한 홍건적의 난 이후의 사회 변화로 말미암아 농장은 획기적으로 크게 확대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농장의 확대는 궁극적으로 국가의 유역인구(有役人口)의 감소와 재정적 결손을 초래하였다. 전민변정도감은 궁극적으로 이와 같은 농장의 확대를 억제시키며, 권세가들의 폐단을 척결하자는 목적에서 설치,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신돈의 여러 개혁 정책이 지나치게 과격한데다가 전민의 변정사업이 당시 위정자들의 이해와 크게 상충됨에 따라 신돈이 실각하면서 이 개혁 작업도 와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