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전법
과전법은 고려말 문란한 토지 제도를 바로잡기 위해 1391년(공양왕 3) 사전 개혁을 단행하여 새로운 전제의 기준으로 삼은 제도이다.
고려의 토지 제도는 경종·목종·문종 때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문종 때 공음전시과·경정전시과의 제정 실시 후 사전의 확대와 과점의 모순이 나타났다. 더욱이 무신의 난 이후 권문세족의 농장확대와 사원전(寺院田)의 팽창으로 국가 경제의 파탄과 농민의 생활고는 극심하였고, 관료에게 분급할 전지마저 부족하게 되었다.
이러한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고종 때 급전도감, 충선왕 때 전민추쇄도감, 공민왕 때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농장 몰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조준·정도전 등과 함께 전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조민수·이색 등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우왕의 아들 창왕마저 축출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킨 뒤, 1390년(공양왕 2)에 종래의 공사전적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1391년 새로운 전제의 기준이 되는 과전법을 공포하였다.
이러한 전제 개혁은 귀족의 경제적 파괴이며 신흥 사대부에 의한 새 왕조인 조선 왕조 개창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과전법은 전국의 토지를 국가 수조지로 편성한 후 수조권을 정부 각처와 양반 직역자에게 분급한 것으로 귀속 여하에 따라 사전과 공전으로 구분하였다. 사전은 경기도에 한하여 전현직 관료의 고하에 따라(18등급) 제1과 150결에서 제18과 10결까지의 땅을 지급하되, 1대에 한하였다. 공전은 경기도를 제외한 전국의 토지로서 수조권이 국가에 소속되었고, 사전인 경우는 수조권이 개인이나 관아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전시과와는 달리 시지를 지급하지 않았으며, 과전법의 성립으로 전호가 전주에게 50%의 조를 바치던 병작 반수제가 금지되고, 수확의 1/10(1결당 30두)을 징수하였다.
과전법에 의한 토지 개혁은 경자유전에 의한 균등 분배가 아니고, 수조권의 재분급에 불과하였으므로 토지 소유의 불균등과 빈부의 차에서 발생하는 모순뿐만 아니라 토지의 세습화가 될 여지가 있었다. 다만, 전호의 부담을 적게 한 점과 전주는 전호의 경작지를 함부로 빼앗지 못하며, 전호도 경작권의 양도나 매매를 금지하여 모든 농민을 한층 토지에 고착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과전·수신전·휼양전 등이 점차 세습되었고, 공신·관리의 증가로 사전의 부족을 초래하였다. 1466년(세조 12)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법을 실시하여 현직 관료에 한하여 최고 110결~10결까지 과전을 지급하였다. 이 제도는 관료의 퇴직 후 또는 사후에 대하여는 아무 보장이 없는 제도였기 때문에 재직 중의 수탈이 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