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유일당 운동과 신간회
1920년대 후반기에 중국 국․공 합작의 영향으로 분산된 독립 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독립 운동의 역량을 높이고, 동시에 좌우익으로 분열된 민족 독립 운동 노선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한 유일당 운동이 일어났다.
1926년 중국 북경에서 한국 독립 유일당 북경 촉성회가 결성된 이후 유일당 운동은 국외에서 크게 확산되었으며, 이어서 국내에도 파급되었다. 만주에서는 유일당 운동의 영향으로 자유시 참변 이후 편성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 통합운동이 추진되었다.
국내에서는 민족 유일당 운동의 영향으로 그 동안 독립 운동의 노선에서 갈등을 빚어 오던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 독립 투쟁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하나로 통합되어 결성된 것이 신간회였다. 신간회는 이상재가 회장으로, 홍명희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일부 인사들은 일제가 제시한 한민족의 자치 운동을 추진하는 등 기회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는데 신간회는 이들 기회주의자들을 배격하고, 민족의 단결과 정치적, 경제적인 각성을 촉구하였다. 신간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였다. 당시 조선 공산당의 활동이 철저히 탄압되고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진 집회가 금지된 상황(치안 유지법)에서 합법 운동 단체인 신간회는 조선인에 대한 착취 기관 철폐, 타협적 정치 운동 배격, 조선인 본위의 교육 실시, 사회 과학 사상 연구의 자유 보장, 식민지 교육 정책 반대 등을 내걸고 노동 쟁의, 소작 쟁의, 동맹 휴학 운동 등을 지도하였다.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대중 운동으로 연결시키기 위하여 일본 경찰이 부당하게 한국인 학생들을 대하는 것을 조사한다고 하면서 광주에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민중 대회'를 추진하였으나 중심 인물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일제의 탄압, 노선간 갈등에 따른 내부 갈등이 일어났고, 코민테른의 노선 변화에 의하여 1931년 5월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