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초(別抄)란 임시로 조직된 군사라는 의미이다. 삼별초는 원래 최우가 수도의 치안 유지를 위해 특별히 만든 야별초에서 시작되었다. 야별초는 지방에도 파견되면서 점차 그 수가 늘어나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분리되었다. 이후 몽골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 온 장정들로 구성된 신의군까지 합쳐서 삼별초가 되었다.
삼별초는 경찰 업무와 도성 수비 역할을 비롯하여 대몽 항쟁에서도 활약을 했으나 거의 최씨 정권의 사병처럼 이용되었다. 그 대가로 이들은 다른 군인들보다 녹봉도 더 많이 받았고 진급에서도 특혜를 누렸다. 그런데 몽골과의 장기전 속에서 강화파의 정변으로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몽골과 직접 강화 교섭을 추진했던 태자가 원종으로 즉위했다. 이에 무신 정권 잔여 세력과 삼별초는 원종을 폐위하고 재항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몽골이 군대를 보내 원종의 복위를 요구하자 곧 굴복하고 말았다. 원종은 개경 환도를 서두르고 직접 몽골에 가서 무신 정권을 끝내기 위한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원종과 몽골군이 고려에 도착하여 강화도의 무신정권에게 개경으로 나오라고 명하자 강화도 내에서 이에 호응하는 정변이 일어나 무신 정권은 완전히 무너졌다(1270). 개경 정부는 삼별초를 없애기로 하고 명단을 압수했다. 이에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폭동을 일으킨 뒤 배중손을 중심으로 승화후 온(溫)을 옹립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다. 삼별초는 좀 더 넓은 진도로 옮겼고 일본과의 제휴도 꾀했다. 이러한 삼별초의 항쟁은 무신 정권의 잔여 세력들이 왕권 강화와 친정 체제 구축을 시도하는 원종에게 도전하는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원종의 이러한 정치적 움직임은 몽골의 후원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삼별초의 항쟁은 자연스럽게 대몽 항쟁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
한편, 개경 정부는 몽골과 합세하여 삼별초의 병력이 남해안 일대에 나가 있는 틈을 타 진도를 급습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삼별초가 저항할 사이도 없이 진도성이 함락되었고 승화후 온과 배중손도 전사했다. 이에 삼별초는 김통정의 지휘 아래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겼고, 이듬해 다시 활동을 재개하여 본토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273년 고려와 몽골 연합군 1만 여 명이 제주의 삼별초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결국, 김통정과 더불어 삼별초 대부분이 전사하면서 3년간의 항쟁이 종식되었다.
*삼별초의 일부가 유구(현,오키나와)로 가서 활동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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