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고종 3년) 두 번에 걸친 통상 요구가 거절당하자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1868년(고종 5년) 차이나호(號)를 빌려 충청도 아산만에 상륙하여, 덕산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생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했다. 급보를 받고 충청감사가 군병을 급히 파견했을 때는 오페르트 일행이 돌아가고 난 뒤였다. 그들 일행은 다시 북항(北航)하여 인천 영종도(永宗島) 앞바다에 들어와 개국통상 교섭을 위해 관리 파견을 요청했으나, 조선 수비병과 충돌하여 아무 성과도 없이 상하이로 돌아갔다.
유교적 윤리를 중시했던 조선 사회에서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의 길안내를 천주교도가 했다는 사실은 훗날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자 외국인을 멀리하는 풍조가 만연되는데 끼친 큰 사건의 하나였다.
그것(남연군 유골)을 잠깐이나마 점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진 자에게 절대적 권한을 부여할 것이며, 서울을 점령하는 것과 다름없는 의의를 가질 것이다. 대원군이 그것을 돌려받으려면 어떤 일이라도 찬성할 것이다. … 대원군을 강요하여 문호 개방의 요구를 듣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이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오페르트.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
석회가 굳고 묘광이 또 깊어서 관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 덕산 부사 양헌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니 도망쳐 버렸다. 대원군은 아버지의 묘가 파헤쳐졌다는 장계를 받고 크게 놀라 몸소 경군(京軍)을 거느리고 가려 하였다. … 이 사건으로 서교(천주교)에 대해 한층 엄한 금령이 내려졌다. <박제형, 근세조선정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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