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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간찰

도암 이재(李縡)의 간찰

學而齋 2011. 3. 22. 13:48

조선 후기의 성리학의 대가였던 도암 이재(李縡, 1680~1746)의 간찰입니다. 이재는 노론 김창협의 문인으로 청주 신항서원의 23대 원장을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庵)·한천(寒泉), 김창협(金昌協)의 문인. 숙종 28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관계에 진출하였으며, <단종실록(端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숙종 42년에 승지(承旨)에 이르러 <가례원류(家禮源流)>시비가 일어나자 노론(老論) 측에 가담하여 소론(少論)을 통박했고, 동왕 45년 영남균전사(嶺南均田使)로 나가 토지정책을 논하다가 파직당한 적도 있었다. 신임사화(辛壬士禍) 직후에 관직을 은퇴, 인제(麟蹄)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심, 영조 1년에는 이조참판을 지냈다. 동왕 17년에는 예문관 제학, 동왕 19년에는 우참찬(右參贊)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조선 후기 성리학계의 대가로서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에 있어 이간(李柬)의 학설을 지지하여, 한원진(韓元震) 등의 호론(湖論)을 반박, 낙론(洛論)의 대표적 이론가로 알려졌으며 <율곡전서(栗谷全書)>를 산정(刪定)했다. 저서로 <도암집(陶庵集)>, 편서(編書)로 <근사심원(近思尋源)> <존양록(尊攘錄)> <주자어류초절(朱子語類抄節)>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 그는 낙론(洛論)을 지지하면서도 유기설(唯氣說)에는 반대하고, "마음을 말함에 기(氣)만을 가지고 단언할 수는 없으며 기가 이보다 승(勝)하면 난(亂)하고 이가 기보다 승하면 치(治)하니" 성현의 말씀의 진실은 '이위기주(理爲氣主)'의 네 글자밖에 없다고 하였다. 즉 그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이 독단에 빠질 위험성을 경고하고, 율곡의 본의에 따라 온건론을 취하고 주리파와의 절충·타협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것으로 보아 학문적 능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정치적∙학문적 업적보다는 초상화 그림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반신초상화로 되었으며 얼굴의 섬세한 필법과 복식(服飾)의 간략한 필선의 대비가 뛰어나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초상화 중 대표적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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