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말의 혼란기에 부족을 통일한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다음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했으나, 친송 정책과 북진 정책을 추진하던 고려 때문에 배후가 불안했다. 건국 초부터 거란을 적대시한 고려 태조(왕건)는 거란을 금수의 나라로 규정하고 계속 경계하도록 유훈을 남겼다. 이에 정종은 호족들의 군사력을 연합한 광군(光軍)을 조직했고, 광종은 청천강을 넘어 압록강 사이에 여러 성과 진을 쌓아 거란의 침입에 대비했다.
거란은 송과 전쟁을 하기 전에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을 멸한 다음, 소손녕을 앞세워 고려를 침공했다(993, 성종 12년). 마침 안융진 전투에서 고려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거란의 공격이 주춤한 틈을 타서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을 하러 가게 되었다. 소손녕은 신라 땅에서 일어난 고려가 거란의 영토인 고구려 옛 지역을 침식하고 있으며 거란 대신 송과 교류한다고 지적하며, 땅을 떼어 바치고 국교를 맺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므로 따지고 보면 거란의 수도인 동경도 고려 땅인 셈이니 침식했다고 할 수 없으며 압록강 유역의 여진 때문에 거란과의 교통이 불가능하니, 이 지역을 회복하여 성을 쌓고 도로를 만들면 교류할 수 있을 것이라 응수했다. 마침내 고려와 거란은 국교 수립 및 고려의 강동 6주 확보에 동의했다. 그러나 거란은 곧 강동 6주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했고, 고려가 송과 계속 교류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이에 고려 내에서 일어난 강조의 정변을 빌미로 다시 침입했다(1010, 현종 원년). 이때 현종은 나주로 피신하였고 개경이 함락되면서 개경을 지키던 강조가 희생되는 등 고려가 위기에 처했으나, 퇴로를 차단당할 것을 두려워한 거란군은 현종의 입조를 조건으로 서둘러 강화를 맺고 철수했다. 물러나는 거란군에게 양규, 김숙홍 등이 설욕하여 수만 명의 포로를 구해냈지만 거란의 대공세에 밀렸다. 고려군과 거란군은 여러 차례 공방전을 벌이다가 결국 서로 큰 피해만 입고 별다른 결말을 내지 못했다. 현종의 거란 입조 역시 실현되지 않았다.
이후 거란은 현종 9년(1018)에 소배압을 앞세워 10만 군대를 동원하여 3차 침입을 했다. 고려에서는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0만 8천 명을 동원하여 영주에 나가 막게 했다. 고려군은 흥화진과 대동강 부근 등에서 거란군을 크게 격퇴했다. 패배를 거듭하면서도 거란군은 개경을 향해 진격했으나 군량 부족으로 결국 철수하다가 귀주에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대패했다(1019, 귀주대첩). 이후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침략하지 않았으며 강동 6주도 되찾지 못했다. 한편, 오랜 전란에 지친 고려도 거란과 국교를 수립했다. 송, 요(거란), 고려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동아시아에 약 100년간 평화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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