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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歷史)

임진왜란 때의 주요 전투

學而齋 2011. 11. 24. 09:13

◎ 부산진 전투(1592. 4.) :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이다.

1592년(선조 25) 4월 일본군이 15만 대군을 이끌고 3대로 나누어 침략해옴으로써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는데, 부산진 전투는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이다.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이끄는 제1번대 1만 8,700명의 일본군은 700척에 나누어 타고, 쓰시마 섬[對馬島]의 오우라 항[大浦港]을 떠나 오후 5시경 부산에 이르러 절영도 앞바다에 정박했다. 이때 부산진 첨사 정발은 전선 3척을 거느리고 절영도에 나갔다가 적선을 보고 대규모 공격이 있음을 짐작했다. 급히 성안으로 들어가 동문루상에서 부사맹 이정헌(李廷憲)과 1,000명 정도의 병력을 소집하여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했다.

다음날 아침 안개가 짙을 때 일본군은 우암동에서 한꺼번에 상륙해 3면에서 부산진성을 일제히 공격했다. 이에 성 안의 군사와 백성들은 하나가 되어 고군분투했으나 활로써 조총을 당해낼 수가 없었으며, 적은 수의 병력으로 일본군을 이길 수 없었다. 그리하여 첨사 정발과 끝까지 대항하던 많은 군민들이 전사했고 성은 함락당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이어서 동래부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 동래성 전투(1592. 4.) : 임진왜란 때 경상도 동래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이 벌인 전투.

1592년(선조 25) 일본군은 4월 14일에 부산진성을 점령하고 4월 15일에 동래성에 침입했다. 침입한 일본군이 동래성을 에워싸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성민을 모아 성을 지키고자 했다.

일본군은 동·서·남문으로 3대가 몰려와서 '싸울테면 싸우고 싸우지 못하겠으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는 패목을 성밖에 세워놓았다. 이에 맞서 송상현은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고 쓴 목판을 내걸었다. 이어 일본군이 포위·공격해오자 군사들을 비롯하여 무기도 없는 성민들까지 결사 항전했으나 끝내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송상현도 전사했다.

 

◎ 상주 전투(이일) 1592. 4 : 왜군의 침입과 북상 소식이 알려지자 조정은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왜군의 북상을 막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문경에 도착했을 때는 그를 기다리던 병사도 사라진 후였다. 상주에서 창고를 열어 800여 명의 농민을 병사로 모았으나 왜군의 기습 공격으로 패주하고 말았다.

 

◎ 충주 전투(신립) 1592. 4 : 이일에 이어 도순변사가 되어 충주로 내려간 신립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왜군을 맞아 싸운 전투이다. 신립은 험준한 문경새재에서 적을 막지 않고 넓은 들에서 기병을 이용한 전법으로 싸웠으나 크게 패배하여 왜란 초기에 전세를 결정적으로 왜군 쪽으로 기울게 하였다.

 

◎ 한산도 대첩(이순신) 1592. 7 :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이 한산도 앞바다로 왜군의 주력 수군을 유인하여 학익진을 펴쳐 섬멸한 전투이다. 이 전투로 조선의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왜군의 수륙 병진 작전을 좌절시켰다.

 

◎ 진주 대첩(김시민) 1592.10 : 조선 수군에 수륙 병진 작전이 좌절당한 왜군은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그 길목인 진주성을 2만의 병력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조선의 진주목사 김시민 등의 관군과 영남 의병장 곽재우 및 호남의 의병들이 호응하여 진주성을 끝까지 지켰다. 수차례 공격으로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왜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갔다.

 

 

◎ 평양 탈환(유성룡) 1593. 1 : 평양성을 점령 때까지 승승장구하던 왜군은 명의 대규모 구원병이 도착하고 조선 관군이 정비되어 반격하자 수세에 처하게 되었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과 유성룡이 지휘하는 조선 관군이 연합하여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 벽제관 전투 1593. 1 : 평양탈환 이후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는1593년 1월 개성에 입성했고, 부총병 사대수는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파주 부근을 점령했다. 이어 명군은 서울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기 위해 출동했고, 일본군도 명군을 공격하려고 북상했다. 일본군은 여석령에서 명군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급습했고, 이에 명군은 벽제역까지 후퇴했다. 이 소식을 들은 명의 이여송은 벽제관으로 급행하여 망객현으로 진출했다. 그곳에서 명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명군은 일본군 조총의 집중사격을 받아 크게 패하였고, 간신히 일본군의 추격을 막았다. 명군은 일단 파주로 후퇴했다가 개성으로 물러났다.

 

 

◎ 행주 대첩(권율) 1593. 2 : 평양 탈환 이후 한양 수복 작전을 위해 행주산성에 주둔한 권율의 조선군은 한양 쪽으로 집결한 왜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으나 적은 병력으로 성을 잘 지켜 승리를 거두었다. 결과 왜군은 한양마저 포기하고 남으로 후퇴하게 된다.

 

 

◎ 명량 대첩(이순신) 1597. 9 : 정유재란 때에는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원균이 무리하게 왜군의 본영을 공격하다가 도리어 크게 패배하여 조선 수군의 주력을 상실하게 되었다(칠천량해전). 무고로 하옥되었다가 백의종군한 이순신은 12척의 함선만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복귀하였으나 사태는 절망적이었다. 이순신은 지금의 진도 앞바다 명량(울돌목)에서 해류의 변화를 이용하여 왜군의 진입을 격퇴하여 전기를 마련하였다.

 

 

◎ 노량해전(이순신,진린) 1598. 11 :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이다.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 11월 18일부터 19일 이틀 사이에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조·명 연합함대가 노량(경상남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해협)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셨으며 노량해전을 끝으로 임진왜란`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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