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은 1607년(선조 40)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九龍村) 그의 외가 곽씨 문중에서 출생하였다. 8세 때부터 회덕(懷德,현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에 있는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면서 훗날 양송(兩宋)이라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송시열은 19세 때인 1625년(인조 3)에 청주의 주성동(酒城洞)에서 한산이씨 이덕사(李德泗)의 딸과 혼인을 하였으며, 1630년(인조 8)에 충남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에게 나아가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으며, 다음해에 회덕으로 돌아왔다. 27세 때에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면서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최명길의 천거로 관직에 나아갔다. 그리하여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로 활동하였는데, 이듬해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낙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孝宗)이 즉위하면서 다시 벼슬길에 나아갔지만 다음해 김자점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계획을 밀고함으로써 송시열은 조정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10년 가까이 향리에서 은거하였다.
1655년 모친상을 당하였고,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세자시강원 찬선에 재임명되어 관직에 나아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해 5월까지 효종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서 북벌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9월 효종이 승하한 뒤 조대비의 복제문제로 예송이 일어나고, 김우명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 때문에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 후 송시열은 화양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생활의 중심지로 삼게 된다.
송시열과 화양동(華陽洞)과의 인연은 매우 깊다. 문헌상에 기록된 것을 바탕으로 볼 때 송시열이 화양동을 처음 찾은 것은 1651년(효종 2)이었으며, 1666년(현종 7) 화양동에 계당(溪堂)을 짓고 본격적으로 거처한 이래 1688년(숙종 14) 4월 마지막으로 화양동을 떠날 때까지 무려 23번이나 왕래하며 기거하였다. 송시열은 암서재(巖棲齋)에 거처를 마련한 이후 화양동 곳곳에 명나라에 대한 존모(尊慕)의 자취를 남겼다. 바위마다 ‘만절필동(萬折必東)’·‘비례부동(非禮不動)’ 같은 선현의 필체나 제왕의 어필을 새겼다. 특히 ‘비례부동’은 민정중이 연경에서 구해와 송시열에게 선물한 것으로 명나라 의종 황제의 필적이었다. 송시열은 "숭정황제어필발"을 직접 짓고, 민정중 등과 함께 바위에다 새겨 놓고는 그 곁에 ‘환장암(煥章庵)’이란 암자까지 지어 그 진본(비례부동)을 보관하게 했다. 화양구곡(華陽九曲)의 유래는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송시열이 지정하고 그의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가 이름붙인 것이라 한다. 구곡 중에서 읍궁암(泣弓巖)은 효종이 승하하자 송시열이 새벽마다 크게 울었던 바위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서원(書院)에서 가장 많이 제향된 인물이 송시열이다. 그는 총 70여 곳의 서원과 사우(祠宇)에서 제향되고 있으며, 그가 모셔진 서원 중 37개소가 사액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높은 위상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많은 서원 중에서 가장 존중되었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곳이 바로 화양서원이었다. 화양서원은 1695년(숙종 21) 그의 수제자였던 권상하에 의해 창건되어 기호사림의 구심점으로서 사론(士論)을 형성하며 조선후기 사회에 군림하였던 서원이었다. 화양서원과 함께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만동묘(萬東廟)인데,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준 명(明)의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을 기리며 청에 대한 북벌의 대의를 간직하고 있었던 송시열의 유지를 받들어 1703년(숙종 29) 권상하 등에 의해 건립된 것이다.
효종 때 김육(金堉)의 건의로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하고자 했을 때 송시열은 반대하기도 하였지만 효종(孝宗)대 이후 중앙정계에서 김장생(金長生) 문인의 정치적 영향력이 증대되면서 청주지역에서도 송시열과 송준길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송시열과 송준길의 정치적 역량에 의해 1656년(효종 7)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에 율곡 이이와 목은 이색을 추향하였고, 1660년(현종 1)에는 사액까지 받았다. 이어서 1662년(현종 3) 문의의 노봉서원에 선액(宣額)이 실시되었다. 노봉서원(魯鳳書院)의 청금록(靑衿錄)에 송준길과 송시열의 명단이 있는 것으로 보아 노봉서원의 원생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1665년(현종 6)에는 신항서원에 새로 사당을 지어 율곡 이이를 다른 제향자들과 구별하여 주향(主享)으로 위차를 조정하기도 하였다. 다음해에는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현재는 청주시 흥덕구 분평동에 있다.)에 이준경을 주향으로 정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신항서원의 원장을 지내는 동안에 발생한 충주지씨 지약해(池若海) 후사(後嗣) 문제 같은 사건은 신항서원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송시열과 반서인계 청주 토착세력간의 갈등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송시열은 1685년(숙종 11) 자신의 학문적 정통성에 대한 확립과 아울러 신항서원 내의 위차문제에 대한 논란을 종식시키려고 신항서원에 묘정비(廟庭碑)를 세웠다. 묘정비는 그의 사후 신항서원의 원장을 역임하는 노론계 원장들에게 위차문제가 발생되었을 때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기준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송시열 사후 신항서원의 원장직은 민진장(閔鎭長), 권상하(權尙夏) 등 그의 문인들이 담당하는 것으로 보아 송시열을 계기로 서원의 주도권이 서인․노론이 장악한 것으로 파악된다.
송시열은 화양동을 근거지로 생활하면서 청주지역의 사림인 홍석기(洪錫箕), 유희령(柳希齡) 등과 교류를 하였으며, 목은 이색의 신도비음기(神道碑陰記), 강수 박훈의 유정서원 춘추향 축문(有定書院春秋享祝文), 규암 송인수의 신도비음기(神道碑陰記), 천곡 송상현의 신도비명(神道碑銘) 등을 짓기도 하였다.
송시열은 재야에서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 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그도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되었고,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장지 ·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숙종 8) 김석주 ·김익훈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신삼고변 사건에서 그는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였으므로 서인의 젊은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또 제자 윤증과의 불화로 말미암아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숙종 15) 1월 숙의 장씨가 아들을 낳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는데 이때 그도 세자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해에 수원 ·정읍 ·충주 등지에서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해에는 시장(諡狀)없이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덕원 ·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었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의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으나, 1716년(숙종 42)의 병신처분(丙申處分)과 1744년(영조 20)의 문묘(文廟) 배향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고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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