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도자기를 약탈하는데 혈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17세기 초까지 백자를 만드는 기술은 중국과 우리나라만 갖고 있었다. 변변한 도자기 하나 없었던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의 도자기는 황홀한 것이었다.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에 휩싸인 일본의 영주들은 도자기 약탈을 넘어 경쟁적으로 도공들을 잡아갔다. 이 도공들 중에 이삼평이 있었다. 이삼평은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자기를 구워 도예의 조상이라는‘도조(陶祖)’로 불린다. 그가 도자기를 구웠던 아리타 마을에는 지금도 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를 기리는‘도조이삼평비’를 비롯해 그를 모시는 신사까지 있다. 그가 발견했다는 백자광‘이즈미야마자석장’과 가마터‘구다니’는 물론, 그가 눕고 앉은 곳마다 모두 사적이 되어 있다. 충남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에는 또 하나의‘도조 이삼평 기념비’가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도 400년이 더 지난 1990년 일본 아리따조오의 주민들이 모금하여 이삼평의 고향이라 알려진 공주에 이삼평을 기리는 비를 건립한 것이다.
한편 임진왜란 때 이삼평이 일본으로 끌려가지 않았다면 이삼평의 이름이 알려졌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조선에 있었다면 그냥 이름없는 독짓는 늙은이로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끌려가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결국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어 신사까지 생겼으니 이삼평은 신이된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상공업을 중시하여 장인을 인정했던 일본 에도시대의 사회적 분위기와 조선후기의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참으로 만감이 교차할 뿐이다. 다행이도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다. 조선시대의 사고가 아닌 것이 다행이다.